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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1] 이상화 고택에서의 야외 공연

공연후기방

by 연출의 꿈 2022. 10. 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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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공연은 이상화 시인을 소재로 연극 우리의 봄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동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독립운동가인 형이 상정이, 아래로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인 이상백과 이상오(李相旿)가 있었다.
7살 되던 1908년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4년 한문 수학을 마친 후 1년간 일본어·산술·박물 등의 신학문을 배우다가 이듬해인 1915년 상경하여 경성부 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8년 자퇴하고 그해 7월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였다.
이때 그는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친구 백기만(白基萬) 등과 함께 계성학교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3월 8일 서문 밖 장터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에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당시 모였던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등사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사전에 주동 인물들이 검속되자 경성부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여 투옥을 면했다.
같은 해 10월 이상화는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강권으로 공주군 출신의 달성 서씨서순애(徐順愛)와 결혼하였다.
서순애는 공주 유지 서한보(徐漢輔)의 딸이었는데, 서한보는 1917년 1월 24일 데라우치 마사타케조선 총독에게 기념품을 기증하고, 1918년 1월 30일에는 충청남도 참사에 임명된자로서, 다소 친일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홍사용·박종화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였고, 1923년 3월 수료하였다.
같은 해「나의 침실로」를 발표했는데, 그해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이듬해 3월 귀국하였으며, 경성부가회동(현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 짓기에만 전념했다. 1924년 고향 친구 박태원이 죽자, 그를 추모하는「이중의 사망」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해 김기진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하였다.
1925년 천도교기념관에서 '파스큘라'가 개최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를 낭독하였고, 같은 해 8월박영희·김기진등과 카프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시경향은 퇴폐주의에 해당하는 편이었는데, 1926년 잡지 <개벽>에 대표작「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 이 시기,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의 주간이 되어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의 시와 논저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8년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부 간사로 있던 중,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치안유지법위반 및 공갈미수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8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며, 곧 구류취소 처분을 받아 출옥했다. 이 시기 그는 서문로에 있던 자택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칭했는데, 수많은 항일독립운동 인사들이 출입하곤 했다.
1930년 잡지 별건곤에「대구행진곡」을 발표하였고, 1932년 자신의 생가이기도 한 서문로 자택을 처분하고 서천대천정(현 중구 장관동 50번지)로 이사하였다. 1933년 8월, 경상북도지사로부터 교남학교강사 인가를 받고 근무를 시작했으며, 본 학교에서 조선어와영어, 작문,권투등을 가르쳤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한편, 이 시기「반딧불」과「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을 발표하였다.
1934년 친구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했으나 사업에 실패하였고, 대구부 남성정(현 중구남성로35번지)으로 이사하였다. 1935년 잡지 <시원>에 시 「역천」을, <조강>에「나는 해를 먹다」를 발표하였고, 그해 큰아버지인 이일우가 별세하였다.
1936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중국으로 건너가,난징·베이징·상하이등지를 3개월간 유람한 후 귀국하였다. 이때 형과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했었는데, 귀국 후 이듬해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그해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하였고, 경정2정목(현 중구종로2가72번지)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6월 명치정2정목(현 중구 계산동2가 84번지)로 이사하였고,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를 비롯해 1929년 별세한 친구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당하였다. 1940년 김소운이 번역한 『조선시집』에 「나의 침실로」 등 3편이 수록되었으며, 1941년에는 잡지 <문장>에 시 「서러운 해조」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명치정2정목의 자택에서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42세.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슬하에 이용희(李龍熙)·이충희(李忠熙)·이태희(李太熙) 등 세 명의 아들과 고명딸 이성희(李星熙)를 후사로 두었으며 2021년 11월 현재 막내아들인 이태희가 4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미국에서 거주중이다.

이상화시인 생가. 안채는 현재 라일락뜨락1956이라는 카페로 꾸며져 있다.

두 번째 공연은 이인성 화가를 소재로한 해당화
대구출신의 서양화가.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고 1938년 개인전, 1940년 김인승(金仁承)·심형구(沈亨求)와 함께 3인전을 가졌으며, 개인 아틀리에를 열어 후배를 양성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작품경향은 인상파적인 감각주의에서 그의 이국취향과 토속적 소재를 발전시켰다. 작품으로 《경주(慶州)의 산곡에서》 《실내》 등이 있다. 한국의고갱이라는 평가도 있다.
술을 즐겨먹고 호탕한 성격이었는데 이게 화근이 되어 비참하고 안타깝게 짧은 삶을 끝냈다. 1950년 11월 밤 술 먹고 밤길에 경찰에게 호통치다가 총살당했다. 물론 6.25가 한창이던 터라 심야 통행금지 법규가 정해져 있던 시기지만 이인성이 큰소리치자 경찰들이 높으신 분인지 알고 보내줬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경찰이 화쟁이라고 비웃듯이 말하자 경찰들이 집까지 쫓아와 잡아간다고 소리쳤고 이 와중에 한 경찰이 공포탄인지 알고(그 경찰 주장에 의하면) 쏜 게 실탄이었던 것. 경찰들이 지들 한 짓을 숨기고자 한동안 간첩이니 친북이니 억울하게 매장되었다가 사후 지인들 필사적 조사로 억울하게 죽은 게 드러나서 관련자들이 처벌받긴 했지만 경찰이라고 하여 과실치사 정도로 대충 면직 처분 정도 솜방망이 처벌을 가했다고 한다. 여하튼, 전쟁이 터진 당시 비전투 지역인 후방에서도 그 시절 치안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다.석주명도 억울하게 군인들에게 무고하게 사살당하고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듯이 말이다.
사후에 평가가 극과 극인데 그가 참여했던 조선미전은 일본에서 한국의 화풍을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설립한 것으로, 193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일제는 조선미전에 향토색 짙은 작품제작을 요구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향토색’은 우리나라를 전근대적이며 정체된 식민지 풍경으로 묘사하라는 주문을 담은 말이었기에 이런 풍경을 즐겨그리던 이인성에게 친일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이인범 교수(상명대 조형예술학과)는 “이인성은 관전과 같은 일제의 제도적 인프라를 통해 성공했다”며 “그에 대한 평가가 일제의 이데올로기와 별개로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화가 손동진(1921~ )은 이인성이 그림을 배우며 입상하던 30년대 그림을 그리자면 조선미전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며 친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반론한다. 그래도 김기창이나 김은호같이 대놓고 친일 선전물같은 그림을 그려서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화가와 달리 이인성이 그린 당시 풍토적인 모습이 꼭 친일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해서(이렇게 치자면 유명화가인 박수근이라든지 여러 화가도 해당한다는 반론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이 공연은 10월 29일까지 매주 토요일 15시, 16시 30분에 각각의 내용으로 30분 정도로 해서 이상화 고택앞에서 진행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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